
ⓒzzoya
그런 후회를 말끔히 해소해 줄 기회가 예기치 않게 찾아온 건 금요일 밤이었다. 그녀가 네모에서의 저녁 약속을 부득이하게 취소한 게 발단이었다. 그녀를 기다리며 와인을 한 잔 비운 다음에야 가게로 걸려온 전화로 그 사실을 통보 받았다. 그녀는 백 번이라도 사죄할 기세로 미안해했다. 사실 나는 불평할 처지가 아니었다. 그녀가 지금 무엇 때문에 밤낮으로 애쓰고 있나?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나 때문 아닌가. 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금요일 밤까지 희생하는 그녀를 내가 탓할 수는 없었다. 전화를 끊고 베니토를 향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천하의 베니토라도 이번만큼은 뾰족한 수가 없는 듯했다.
“이거만 비우고 가야겠어요.”
이미 한 잔 시켜놓은 레드 와인을 보며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지만 바람맞은 처량함을 감추기에는 다소 부족한 느낌이었다. 몇 안 되는 자리를 점령한 금요일 밤의 연인들 틈에 있자니 평소의 뻔뻔함도 창피한 줄 아는지 좀처럼 나오지 못했다.
생각해 보니 혼자 지내는 밤에 그리 익숙지 않은 나였다. 살아있는 시체로서의 밤을 보낼 땐 엄마나 간호사나 청소부가 수시로 들락거리며 나를 귀찮게 했고, 감금에서 풀려난 다음에는 언제나 수지 큐와 함께였다. 결국, 수지 큐와 헤어지고 고작 몇 달이 생에 유일하게 혼자였던 시간이다. 진정한 외로움은 처음부터 혼자일 때가 아니라 함께 했던 이의 부재로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이 새삼 실감 났다. 나는 이제 결코 혼자 지낼 수 없는 나약한 인간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내게는 우주의 종말이라는 피할 수 없는 비극을 함께 맞이할 누군가가 곁에 있어야 했다. 그리고 그것은 그녀여야만 했다. 그녀가 내 눈을 멀게 하고 정신을 아득하게 해서 그 비극으로부터 나를 박리시켜줄 것이기에…….
수지 큐가 등장한 건 그때였다. 아마도 퇴근 중이었을 수지 큐와 멍하니 잔을 들고 있던 내가 눈이 마주쳤다. 예정에 없던 조우에 대한 반응은 멈칫거림과 크게 뜬 눈으로 드러났다. 어떻게 할 것인지, 즉 못 본 척할지 아니면 눈인사 정도만 할지, 그것도 과하다면 그저 서로 인지한 것만으로 만족하고 끝낼지 찰나의 시간 동안 고민하는 기색이 서로 역력했다. 한발 빠르게 결정을 내린 쪽은 나였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수지 큐도 자연스럽게 내 쪽으로 걸어왔다. 이번에도 나는 아코디언 도어를 활짝 열어둔 길가 쪽에 앉아 있었기에 수지 큐는 가게 현관을 거치지 않고 곧장 다가올 수 있었다.
“여기서 뭐 해?”
수지 큐가 물었다. 나는 들고 있는 와인을 다른 손으로 가리키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냥 와인 한잔 마시고 있는데.”
사려 깊은 베니토가 다가와 의자를 빼주자 수지 큐가 내 눈치를 보았다. 나는 기꺼이 앉으라고 손짓했다.
“약속 있던 거 아니야?”
자리에 앉은 수지 큐가 주위를 둘러보다가 다시 내게로 눈을 돌리며 물었다.
“아니 뭐…….”
우물거리는 말끝에 기분 내키는 대로 덧붙이는 습관이 나왔다.
“저녁 같이 먹을래? 별다른 계획 없으면.”
“고마운 말인데, 벌써 먹었어.”
“그럼 와인이나 한잔해.”
끈질긴 내 성격을 알아서인지 수지 큐는 잠시 생각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베니토, 여기 와인 한 잔 더 주세요. 그리고 카나페, 여기선 뭐라고 한댔죠?”
“타르티나.”
“타르티나 한 접시 부탁해요.”
베니토는 싱긋 웃으며 주문을 받아갔다. 시선을 돌리자 나를 물끄러미 보는 시선과 마주쳤다.
“좀 변한 것 같네.”
수지 큐가 맥없이 말했다.
“어떻게? 더 나빠진 거 같아?”
“아니. 좋고 나쁜 걸 떠나서 그냥 달라진 게 느껴져. 와인은 언제부터 마신 거야? 그런 건 여자들이나 먹는 거라며?”
“생각해 보니 로마 검투사나 중세 기사들도 와인을 마셨더라구. 심지어 세계대전 때도 군인들에게 와인이 제공됐대.”
“내가 한번 마셔 보라고 할 땐…….”
“그래, 그래, 그랬었지.”
나는 얼른 부끄러운 과거를 입막음 했다.
“근데 경험하면 달라지는 것도 있잖아.”
때마침 베니토가 와인을 들고 와준 덕분에 대화는 잠시 중단되었다. 수지 큐는 레드 와인만큼 붉은 입술로 부서질 듯 얇은 잔에 담긴 붉은 액체를 한 모금 들이켰다.
“괜찮네.”
그거 보라는 표정으로 나도 잔을 들었다. 건배하기에는 어색한 상황이었지만 결국 두 개의 얇은 잔이 가볍게 부딪혀 경쾌한 파동을 만들어냈다.
“그 사람이랑 약속 있었던 거지?”
방심한 틈을 타 수지 큐가 의표를 찌르고 들어왔다. 부정하면 거짓말이 되고 인정하면 수지 큐는 대타가 된다. 부정하면 본의 아니게 약속을 지키지 못한 그녀가 얼마나 속상해하겠는가. 물론 그녀가 알 리 만무하겠지만. 인정하면 꿩 대신 닭이 된 수지 큐의 기분도 그 못지 않게 씁쓸할 것이다. 결국, 둘 중 하나는 서운하게 될 일이었다.
적지 않은 세월이 내게 준 교훈 중 하나는 솔직과 정직은 생각보다 좋은 미덕이 아니라는 것이다. 최소한 인간관계에서는. 거짓말을 하면 그 부담을 오로지 나 혼자 지고 감당하면 그만인데, 솔직하게 털어놓는 순간 그 짐의 절반, 어쩌면 그 이상을 상대에게 지우게 된다. 진짜 남자라면 상대에게 그런 부담을 지우는 대신 혼자 짊어지는 길을 택해야 하지 않겠는가. 홀로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괴로워하면 된다. 상대의 마음을 편하게 해 주기 위해 그 정도 노력은 해야 한다. 그러나 이 순간의 선택은 그리 간단치 않았다. 수지 큐의 기분을 배려해서 거짓말을 한다면 나는 그녀를 금요일 밤을 함께 할 만큼 가까운 사이가 아닌 것으로 만들게 된다. 그녀가 바쁘다는 걸 수지 큐도 알까? 알면 왜 바쁜지 이유도 알까? 수지 큐가 지미의 팀에서 나온 지금, 그 가능성에 판돈을 걸 수는 없었다.
“요즘 그 팀 소식 잘 모르지?”
고심 끝에 나는 그렇게 물었다.
“왜? 무슨 일이라도 있어?”
역시나 수지 큐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있지.”
나는 잔을 빙빙 돌리며 무심을 가장했다.
“거기 지금 밥 먹을 시간도 없을걸. 새로운 이슈가 생겼거든. 밥값을 할 때가 된 거지. 그동안 빈둥빈둥 잘 놀고먹었잖아.”
수지 큐는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질문을 대신했다. 나는 말코비치 사건에 관해 가감 없이 얘기했다. 적절한 타이밍에 나온 음식이 발화로 인해 허공에 발산된 에너지를 보충해주었다. 토마토, 치즈, 아보카도 무스, 그리고 그 위에 연어와 허브를 올린 타르티나는 누구에게나 꽤 먹음직스럽게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내게 떨어진 당분을 채우는 것 이상의 의미는 주지 못했다.
“그래서 결국 경찰에 신고를 안 한 상태라는 거지?”
“지미가 극구 말리더라구.”
“네가 언제부터 짐의 말을 고분고분 잘 들었다고?”
수지 큐가 갑자기 언성을 높이는 바람에 모든 시선이 집중되었다. 네모의 훈훈한 온기 탓일까 아니면 고기와 와인 탓일까. 갑자기 불쾌한 열기로 온몸이 확 달아올랐다.
“내 말 제대로 들은 거야? 고분고분하고 말고 할 문제가 아니잖아. 일이 꼬이면 나한테도 좋을 게 없다니까?”
“아니, 예전의 너라면 자기 여자를 지키는 데 다른 사람의 허락은 구하지 않았을 거야.”
한 방 먹은 기분이었다. 맞는 말이다. 실체적 위협을 눈앞에 두고도 이런저런 일을 따지는 건 나답지 않다. 물론 무조건 예전의 내가 지금의 나보다 더 낫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현재 내가 취한 방식이 구식보다 나은가에 대해 확실히 그렇다고 말할 수도 없다. 결국, 결과로만 평가될 일이다. 문제는 포기한 쪽의 효용성을 영원히 알 수 없다는 데 있었다.
“결국 그 여자 때문이겠지. 그 여자에게 잘 보이려고. 그 여자의 마음을 얻으려고. 안 그래?”
“안 그래.”
나는 기분이 나빠진 나머지 어린애처럼 부정했다. 이성적으로 부정하려 해도 속마음은 수지 큐의 말이 맞다라고 인정하고 있었고, 유치한 반발심과 저항 외에 다른 생각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게밖에 보이지 않는걸. 내 앞에서는 목숨처럼 아끼던 정체성을 지금은 헌신짝처럼 버리고 있잖아.”
“그래, 네 말이 맞아. 그러니 이제 그만둬. 이런다고 너와 나 사이가 달라질 일은 없으니까. 아니 달라지겠군. 더 안 좋게 말이야.”
생각지도 않은 모진 소리가 저절로 튀어나와 수지 큐는 물론 나마저도 깜짝 놀라게 했다. 수지 큐는 냉정함을 되찾으려는 노력을 냉소로 시작했다.
“그런 걸 바라고 한 말 같니? 넌 아직도 참 어리구나.”
하지만 그 노력은 결실을 보지 못한 듯, 잠시 후 수지 큐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붙잡을 생각이 없던 나는 미동은커녕 눈길도 주지 않았다. 몇 걸음 옮기던 수지 큐가 다시 돌아와 식탁 위에 지폐 두어 장을 쾅 내려놓을 때도 나는 반쯤 내리깐 눈을 들지 않았다. 어리다고? 그렇다면 그렇게 행동해 주지. 모두의 이목이 주목된 자리에는 그런 어린애 하나가 앉아 있을 뿐이었다. 그곳에 앉아 있을 자격이 없는 유치한 어린애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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