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 사회는 '다름’과 '다름의 인정’을 중시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한 도시에서 사용하는 모어(mother tongues)만 해도 100개가 넘는다.
그 모어를 바탕으로, 서로 접해본 적 없는 여러 종류의 문화가 한 공간 안에 압축돼 있다. 이런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엄청난 갈등밖에는 없다.
캐나다 사회도 갈등이 없었던 건 아니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중반까지 엄청난 갈등을 겪었다.
그리고 그게 이런저런 사연으로, 역사라는 이름으로 정리돼 지금은 진보-중도-보수 간에 갈등은 그다지 크지 않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진보일 수밖에 없는 상황, 중도일 수밖에 없는 상황, 보수일 수밖에 없는 상황을 서로 이해하고, 그 차이를 놓고 다투지는 않기 때문이다.
다툼이 일어나는 지점은 '무엇이 현재에 적합한가'이며, 그건 실용주의(pragmatism) 틀에서 정리된다. 물론 실용주의에 대해 비판도 많지만, 그런 다툼이 정치적으로 끝나는 지점은 투표다. 민주주의의 다수결이다.
간혹 투표에서 다툼을 끝내고 싶지 않은 사람도 있다. 민주주의의 다수결이라는 선을 무시하는 과격 주의(radicalism)에 대해 캐나다 사람들은 대강은 배제와 무관심으로 대응한다. 과격 주의가 다른 사람의 권리를 침해한다는 안전선을 넘을 수준이면, 그때는 공권력이 발동한다.
나는 이런 캐나다에서 27년을 살았다. 청소년기부터 장년기까지, 한국어를 잘하지만, 사고방식은 한국 사람과 같지 않다. 그런 처지에서 봤을 때, 난 한국 사람 중에 과격주의자가 꽤 많은 점에 놀란다.
과격주의자들은 다름의 인정보다는 하나로, 특히 자기들이 들고 있는 방향으로, 통일감을 강요하면서 다름에 대해 상당히 배타적이다.
통일감을 강요한다는 게 타인도 자기처럼 생각해야 '정당하다’라거나 '마땅하다’라고 생각하고 표현한다는 얘기다. 자기의 사고 바깥에 존재하는 생각에 대해 '틀렸다’거나 '잘못됐다’라는 비난의 활을 쉽게 꺼내 든다. 나는 그런 전투 성향이 영 불편하고 무섭다.
배타성은 가끔 굉장한 적대감으로 표출되기도 한다. 어떤 사실이나 상황을 객관적으로 관찰하기보다는 감정적으로 소화한다. 사실을 왜곡하는 거 보고 깜짝 놀란 경험도 있다. 과학적 사실보다 사상적 사실을 우선시한다. 심지어는 추정이 '사실'로 왜곡되는 걸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걸 봤다. 단순히 진보냐, 보수냐를 놓고 마치 종교처럼 섬기는 과격 주의에 여러모로 당혹스러울 때가 많다.
그리고 당연히 다를 수밖에 없는 두 집단이, 다르다는 이유로 싸운다. 예컨대 예술가 같은 사람들은 기존과 다름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집단으로, 그 성격이 대게 진보적일 수밖에 없다. 반대로 경전 종교의 성직자 같은 사람들은 기존의 해석을 유지하려는 비율이 높아서, 그 성격이 대게 보수적일 수밖에 없다.
두 집단이 보수는 악, 진보는 악 이란 방향성을 놓고 상대를 자기 입맛대로 정의하려고 싸운다면, 그건 끝날 성격의 싸움이 아니다.
개인적으로 여기에 막대한 에너지를 쏟아붓는 거를 보고 기겁한다. 그 에너지의 소용돌이에는 사람 인격이나 때로는 목숨까지 들어간다는 점이 경악스럽다. 한국의 다툼에 참전하겠다는 뜻으로 내가 이런 글을 쓰는 건 아니다. 그건 시간 낭비라는 무서운 일을 초래한다.
여자보고 남자처럼 생각하지 않는다거나, 그 반대로 남자보고 왜 여자처럼 생각하지 않느냐고 싸운다면, 그 싸움이 끝나지 않는다. 그보다는 다르다를 인정하고 공존과 합의점을 찾는 게 더 실용적 아닐까 싶다. 자꾸 외국의 사례를 들먹거리는데, 외국은 그런 성 정체성 차이점 가지고 싸운 게 아니라, 어차피 다른 건 다른 거니까 공존과 합의점은 찾아야 하지 않느냐는 기본 바탕 위에서 갈등한다는 차이가 있다.
이런 글을 쓰는 건 아주 단순하고 순진한 의도다. 단순한 견해 차이에 그토록 많은 에너지와 비용과 시간을 쏟아붓는 게 그게 실용적이냐는 질문을 하고 싶다. 그리고, 다음 글에서는 내 안에 살아있는 한국인 관점에서 이야기를 해볼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