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분 전의 것도 기억하지 못하시는 할머니와의 짧은 만남을 뒤로 하고 커피숍에 와있다. 학창시절에 살던 동네다. 굳이 이곳으로 온 건 다름아닌 초밥집때문이다. 10년 전에 종종 가던 서울의 초밥집이 이 동네에도 생긴 것이다. 그러고보면 나의 목적지는 주로 식당이다. 어릴 때는 세상의 다양한 모습이 보고싶어 여행을 꿈꿨는데, 어느새 나의 여행루트는 음식을 따라가고 있다.
버스를 타고 이 동네로 오는 길에 날 가장 잘 아는 친구와 통화를 했다. 내년에 그 친구와 같이 살 계획을 짜고 있었는데, 어째서인지 문득 아직 정착하기엔 이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아직 세상구경을 못다했는데, 이러다 결혼이라도 하고 아이가 생기고 나이가 더 들면? 지금처럼 자유롭게 여행하진 못할 것 아닌가! 사람들은 내게 그정도면 많이 돌아다녔다고 말하지만 세상엔 내가 못가본 곳, 못해본 것 투성이다.
만약 내가 계획대로 너와 함께 사는 대신 아프리카로 떠난다고 하면 화날거야?
라고 친구에게 물었다. 예상대로 반응은 영 아니올씨다여서, 아프리카뿐 아니라 유럽도, 아시아도 아직 구석구석 다 가보지 못했단 말야!
나는 억울한듯 말했다. 아니면 너도 나랑 여행할래?
라고 제안하면서도 혼자하는 여행이 더 내 여행다울텐데... 하는 고민이 들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상대방은 전혀 흥미가 없었다.
그런데 우습게도 이런 갈증에 비해 정작 여행을 하거나 새로운 것을 경험할 때면 그다지 감동하지는 않는다. 촌년티가 날까봐 체면을 차리느라 그랬을까. 기대이하라고 실망한 것일까. 그저 모든 게 원래 알고 있었던 것처럼 당연하고, 그래서 대수롭지 않다. 안타까운 건, 그래서인지 시간이 지나면 잘 기억나지도 않는 것이다. 그에 비해 사소한 것에도 엄청 감동하고 기뻐하는 지인들을 보면 그 순간을 하나하나 소중히 기억하고 있다. 나 역시 세상 모든 것이 신기하고 재미있었던 어릴 적의 기억이 어제 일보다 더 선명한 것처럼.
아무튼 가려는 초밥집은 점심때나 오픈을 하기 때문에 미뤄둔 할 일을 할 겸 커피숍에 와있다. 미뤄둔 할일은 미식여행기획의 마무리작업이다. 나의 하루, 나의 여행에서 음식이 언제부터 이렇게 중요해진걸까. 어릴 때 엄마 손에 이끌려 평양냉면이니, 우동이니 맛집을 따라 골목골목을 돌아다니던 기억이 스친다. 그땐 엄마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는데.
아무튼 여행의 목적지는 나에게 익숙한 뉴욕으로 정했다. 그래봤자 그새 너무나 많이 변해 길이나 제대로 찾을 수 있을 지 모르겠지만. 미식여행이라고 하면 아무래도 요리를 했던 나에게 전문가적 지식과 설명을 요구하게 될테기에 하나하나 되짚어보는데, 이럴 수가. 모든 것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무슨 재료를 썼는지, 어떻게 조리를 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 이유는 역시나, 모든게 너무나 당연하고 일상적이었기에.
일탈조차 일상적인 나에게 매일같이 하던 일은 오죽하겠는가. 분명 요리도 내가 간절히 하고 싶었던 일인데, 그 간절함은 온데 간데 없고 어느새 감사함을 잊은 거겠지. 그러니 내게 무엇이 소중했을까. 아직 갖지 못한 것만이소중하지 않았을까. 초밥집이든, 아프리카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