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여행 자유화가 시행된 1989년, 대사관 앞에는 비자를 신청하기 위한 줄이 하염없이 늘어서 있었다. 오랜 기다림에 지쳐 벽에 기대 조는 사람, 서서 끼니를 떼우는 사람... 그리고 나도 있었다! 내 나이 여섯이었다.
대지의 숨결이 느껴지는 그랜드캐년, 메타세콰이어 나무가 하늘로 솟구치던 요세미티 국립공원. 서툰 영어로 낡은 지도를 넘겨가며 운전을 하면서도 콧노래를 멈추지 않으시던 아빠는 밤이 되면 차를 갓길에 세워놓고 밤하늘을 수놓은 별자리를 읽어내려 가셨다. 따뜻한 자동차 본네트에 누워 아빠의 이야기를 한참을 듣던 여섯살의 밤. 내 인생의 첫 수업이자 첫 여행은 미 서부 로드트립이었다.
그 후로도 나는 수업을 빠져가며 여행을 다녔다. 1999년엔 프랑스 남부의 샌폴이라는 어느 시골마을의 수도원에서 주방일을 돕고 빨래를 널며 한달을 살기도 했다. 근처엔 샤갈의 생가가 있었고 버스만 타면 니스의 파란 바다 앞에 놓인 피카소의 박물관에 갈 수 있었다. 맨밥에 올리브 몇 개 올려 알루미늄 용기에 꾹꾹 눌러 담아 이탈리아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고, 로마의 어느 농구장 위에 침낭을 펴놓고 잠을 청했다. 내 나이 열 여섯이었다. 대학교때는 꽹과리와 장구를 쳐가며 동해안 일주를 하기도 했고, 대한민국 청소년 대표로 뽑혀 일본의 방방곡곡을 여행하기도 했다.
엄마는 해외여행 자유화가 시행되기도 전인 1970년대부터 외국을 오가셨는데, 사실 그보다 더 오가신 건 맛집이었다. 어린 내 손을 붙들고 우리나라에서 제일 맛있다는 평양냉면집이며 숨은 우동집을 데리고 다니셨고 저녁으로는 빠에야를, 도시락으로는 수제버거를 만들어 주셨다. 어릴 때는 그런 엄마가 유난스럽게 느껴졌는데 아뿔싸. 지금 내가 그러고 있는 게 아닌가! 어린 날 세계여행을 꿈꾸던 나는 어느새 세계의 ‘맛집’ 여행을 꿈꾸고 있었다.
나는 요리사가 되어 세계를 여행하기로 결심했다. 졸업하자마자 미국 조리인턴십을 준비했고, 좌절했다. 요리 전공자도 아니오, 경력도 없어 비자가 나오기 힘들다는 이야기였다. 무작정 미국으로 갔다. 영어를 공부할 생각으로 어학원 대신 동네 2년제 대학교를 다니고 있었고 얼마 후 등록금 전액을 환불받았다. 한국으로 급히 귀국해야 했기때문이다.
엄마는 의식을 잃은 채 침대에 누워계셨는데 문병 온 손님들은 나를 보고 더 충격을 받았다. 미국에서 캠핑이며 럭비를 하는 바람에(지역 토너먼트 대회까지 나갔다!) 덩치는 두배가 되고 피부는 새카매져서 돌아온 것이다.
방황 끝에 다시 요리사의 길을 걸었다. 당시 요리사에 대한 국내인식은 썩 좋지 않았고 관련 정보도 턱없이 부족해 무척 불안하고 버거웠다. 요리학원의 시연회나 무료 수업을 찾아 다녔고 맛있어 보이는 식당마다 일을 시켜달라고 전화를 걸었다. 2008년, 우여곡절 끝에 일하게 된 이탈리안 식당은 텃새와 견제가 너무 심했다. 질문을 하면 “내가 이걸 어떻게 알아냈는데” 하며 알려주지 않았다. 요리학교에 다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사람들을 따라잡으려면, 그것도 제일 좋은 요리학교로!
간단히 말하자면 그 뒤로 나는 뉴욕에서, 도쿄에서, 파리에서 그리고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요리와 여행을 하며 살아왔다. 꿈을 이룬 것이다. 이제는 나와 같은 꿈을 꾸는 사람들과 함께 여행을 나누고 음식을 나누고 싶다. 우리의 삶이 더더욱 맛있어지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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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난 자의식 과잉이 느껴지는 글. 실은 프로필에 올라갈 자기소개다.
여행과 요리에 관한 나의 배경을 나타낼 수 있는 자기소개를 써달라고 했다. 어떻게 써야할 지 몰라 남들이 써놓은 걸 봤는데 다들 굉장한 사람들 같았다. 별 것도 없는데 스스로 대단한 양 포장해야하는 부담감, 허풍떠는 약장수가 된 것 같은 양심의 가책, 부모님 잘 만나 호사를 누렸다는 어떤 부끄러움, 무엇보다...
그리움이 밀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