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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스스로는 은둔을 벗어나고 싶지 않다고 믿었다. 분명 활개치고 다니던 때도 있었지만, 어느새 체력과 열정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이제는 굳이 나서지 않는 편에 편안함을 느끼게 되었다. 오히려 왜 그렇게 열심히 살았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뭘 위해 그렇게 달렸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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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땐 유명세가 편리한 걸 넘어 자랑스러운 적도 분명 있었다. 그러나 그만큼 ‘나를 잘 알지도 못하는’사람들 입에까지 오르내리고 상처를 받는 일이 생기면서 눈에 띄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생겼다. 학창시절엔 일명 모두의 친구였던 내가, 나이가 들면서는 아무하고나 연을 맺지 않는 비싸고 특별한 사람인 척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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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숨기는 게 미덕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모두 허리띠 졸라매고 열심히 일하는 마당에 빙하와 오로라를 보러 다니는 이야기를 감히 할 수 없었다. 부럽다는 이야기를 들을수록 마음이 불편했다. 팔자좋은 금수저라며 나를 비아냥대던 동창도 있었다. 내가 행복하면 누군가는 불행해진다는 걸 깨달았다. 나와 나의 행복을 숨기고 힘든 이야기나 늘어놓게 되었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정말 그렇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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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팀잇을 막 시작했을 때, 악몽을 꾼 적이 있다. 지인 하나가 사진을 포함한 나의 모든 신상명세와 연애사, 가정사를 스팀잇에 올린 것이다. 그녀는 경악한 내게, 삭제하면 되는 것을 뭐 그렇게 호들갑이냐고 말했다. 그런 꿈을 꿀만큼 ‘나의 정체’ 가 이곳에 알려지는 것이 싫고 두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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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사람들은 생각보다 나에게 관심이 정말 없고, 나 역시 숨기고 말고 할 정체거리가 별로 없다. 우습지만 그건 또 그거대로 떨떠름하다. 어떻게든 나의 존재감을 확인하며 살고 싶은데, 그게 타인과 전혀 상관이 없을 때가 있고 타인이 꼭 필요할 때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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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알게된 강사님 한 분이 SNS 관종 욕할 것 없다며, 우리 모두는 관종이라고 했다. 그 말을 들은 찰나에는 동의하지 못했다. 나는 관심받는 것이 부담스러워 SNS 를 하지 않거나 그만두었다고 반박하고 싶었다. 그러나 내가 정말 관심이 필요없는 사람일까. 반박도 결국은 나의 다름을 인정받기 위한 것이지 않은가. 음지가 편하다고, 존재가 드러나는 게 껄끄럽다면서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 결국 때와 장소, 방법이 다를 뿐. 누구나 어떻게든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싶은 법이다. 연애를 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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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치 못하게도, 나의 이름과 얼굴을 알려야 하는 일이 생겼다. 특히나 감도 잃고 자신도 떨어진 분야의 전문가로 나를 내세워야해서 부담감과 난처함, 부끄러움이 이루 말할 수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더이상 숨고 싶지 않다. 부끄럽고 자신없다고 접고 또 접다보면 언젠가는 사라져 버릴 것이다. 구겨지고 찢어졌어도 다시 조심조심 펼쳐보자,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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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팀잇에서도 그렇다. 이곳에서 솔직한 나의 감정과 개인사를 드러내기 위해선 익명성이 절대적으로 보장되어야한다고 믿었다. 거기엔 내가 이중생활(?)을 한다는 전제가 깔려있었다. 현실에서,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는 면모를 여기서는 내비친다거나. 근데 그것도 나요, 이것도 나지 않은가. 사람들 시선이나 구설수에 오르는 게 두려워 뭐 하나 감추기 시작하면 내 삶에 제약이 생기고 만다. 알아달라 강요할 수는 없지만 숨지도 말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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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름 전 본 국가자격증 시험은 감사히 잘 보았고 약 두달 뒤 면접이 남았다. 추석이 지나면 약 8개월만에 소중한 사람을 만난다. 그 뒤엔 아마도 요리와 여행에 관한 일을 시작하게 될 것이다. 어제는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나 새벽 3시까지 술잔을 기울였다. 한줄기 빛은 가능성이며, 암흑 속에 갖는 것이야말로 희망이라던 친구의 말이 오래 남는다. 깊은 고민을 잊고 지냈다는 생각이 든다. 일기만 쓸 것이 아니었다. 바닥말고 하늘을 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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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팀잇을 떠나지 않았다. 이곳에 글을 쓰던 시간에 다른 일을 했고 다행히 즐거웠다. 자리를 비운 사이 남겨주신 댓글이, 늦었지만 참 반갑고 감사하다. 나를 기억하고 내가 기억하는 사람이 있는 한, 이곳을 말없이 떠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