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 13. 정령이 사는 동네와 영어 공부하는 택시 기사

By @shgddd3/16/2018kr


**#1 우리 동네엔 늙은 정령이 산다**
오후에 동네를 산책한 적이 있다.

나의 새 동네, 30년쯤 된 이 오래된 아파트 단지에는
주로 젊은 부부들과 고령의 사람들이 산다.
저 옛날 서민들을 위해 보급했던 주공 아파트라
평수가 넉넉하진 못하다.
1인, 2인 가구가 주로 사는 이유다.

단지는 우물처럼 차분하다.
신중히 갓 어른의 삶을 시작한 젊음들과
조용히 자신을 돌아보는 늙음들이
느긋하고, 느슨하게 뒤섞인 이 곳.

편안하게 팔짱을 낀 젊은 부부가
느린 걸음으로 마트로 향할 때
아파트 단지 곳곳엔,
길고양이처럼 앉아 세상을 관조하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있다.

나도 풍경의 한 조각처럼
젊음과 늙음 사이를 천천히 산책했다.
햇볕은 적당한 온도로 거리를 굽고,
나는 방금 겨울잠에서 깬 곰처럼
킁킁대며 거리의 냄새를 맡았다.


>좋다.
나도 모르게 좋다라는 말이 과즙처럼 터져나왔다.

산책을 하며 느낀 기분을 와이프께 말했더니
자기도 이 동네가 좋단다. 그러면서 하는 말,


>할아버지 할머니들 좋아. 동네 정령들 같고.
정령이라.

어쩌면 이 동네의 늙음들은
마을을 지키는 수호 정령일지도 모르겠다.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동네를 지키는, 그런.



#2 택시 기사가 말했다 "해브 어 굿데이"


어제 오후였다.

외근 나갈 일이 있어서 택시를 탔는데,
기사 분이 중년 아줌마였다.
나이는 우리 엄마 정도 되어 보였다.
나는 언제나처럼 짧게 행선지를 말하고
곧바로 휴대폰에 시선을 박았다.


>쉬 이즈 댓 뷰티풀 >쉬 이즈 낫 댓 뷰티풀 >쉬 이즈 댓 뷰티풀 >쉬 이즈 낫 댓 뷰티풀
처음엔 무슨 말인가 싶었다. 기사는 운전하는 중에 계속 거친 발음으로 '쉬 이즈...'를 반복했다. 거슬렸다. 대체 뭐하자는 거지 싶었다. 그때 운전석과 조수석 사이에 책 한 권이 보였다. '기초 영어 500'
>제가 실은 영어 공부를 하는데요.
기사 아줌마의 얘기는 그렇게 시작됐다. 언젠가 국민연금공단에 가는 외국인 손님을 태웠는데 알아듣질 못해서 답답했다는 얘기. 그래서 조금이라도 알아듣기 위해 혼자 영어 공부를 하고 있다는.
>오늘 집에 가면 아들한테 '러블리 마이 썬'이라고 해야겠어요. >아들이 엄청 놀라겠지? 근데 손님, 이 말 맞는 거죠?
그 말을 듣자, 엄마가 떠올랐다. 대학생 때였다. 어느 날, 엄마나 날 붙잡고 말했다. 나도 영어가 알고 싶다고. 아니, 말하는 건 못해도 좋으니 읽기만 했으면 좋겠다고. 그래서 알파벳 발음부터 기초 영단어까지 일일이 알려드린 적이 있다.

엄마는 고등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십대 때부터 공장에서 일했다고 한다.
친구가 잘 다린 교복을 입고 등교할 때
엄마는 해진 사복을 입고 공장으로 출근했다.
교복이 너무 입어보고 싶었다고, 엄마는 말했다.

그러나 엄마는, 돈을, 벌어야 했다.
병환으로 자리에 누운 아버지를
손을 다쳐 일을 할 수 없게 된 어머니를
굶게 놔둘 순 없어서.


>영어하시는 거 알면, 아드님이 좋아하실 거예요.
택시가 목적지에 도착해 내리려는데 기사 아줌마가 크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
>손님, 해브 어 굿데이!
기사님을 향해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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