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월가를 들어가며: 선배와의 통화 (05)

By @menerva5/10/2018kr-p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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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가를 들어가며]**는 뉴욕의 투자은행에 취직하기까지의 제 이야기를 각색한 연재 수필입니다. 지난 편은 본문 밑에 링크되어 있습니다.



> 안녕하세요,
저는 선배님께서 졸업하신 대학교의 3학년에 재학 중인 미네르바입니다. 현재 근무하고 계신 투자은행에 관심이 있어 졸업생 데이터베이스를 살펴보던 중 선배님의 성함과 이메일 주소를 발견했고, 이렇게 연락을 드립니다.
업무로 많이 바쁘시겠지만 근무하고 계신 투자은행에서의 경험을 조금 들어보고 싶습니다. 혹시 짧은 전화통화가 가능하신지요? 저는 보통 늦은 오후나 이른 저녁 시간이 가장 편하고, 제 번호는 다음과 같습니다. 혹시 도움이 될까 해서 제 이력서도 첨부합니다.
선배님과의 통화가 저에게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제 이메일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미네르바 드림.
비슷한 내용의 이메일을 50번도 넘게 보냈다. 한국에서는 취업 활동을 해본 적이 없어 잘 모르겠지만 미국에서는 취업 시 네트워킹이 정말 중요하기 때문이다.

학연이 한국사회의 문제로 자주 거론되지만 사실 미국이야말로 정말 학연주의가 팽배한 곳이다. 차이점이 있다면 한국에서는 후배들을 뒤에서 챙겨주는 분위기인 반면 미국에서는 선배들이 아예 대놓고 후배들을 끌어준다. 하버드나 와튼 같은 명문 대학의 졸업생들이 월스트리트에 많이 있는 것은 그 학생들이 똑똑하고 열심히인 것도 있지만 그만큼 업계에서 동문파워가 막강하기 때문이다.

학연주의의 옳고 그름을 떠나 직장을 구하는 재학생의 입장에서는 비싼 등록금을 내는 만큼 동문 네트워크를 적극적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었다. 실제로 미국 학생들은 공채와 같은 정규 절차를 거치지 않고 네트워킹을 통해 인터뷰를 딴 다음 오퍼를 받는 경우도 많았다.

투자은행의 경우 무조건 공채를 거쳐야 했지만 경쟁률이 워낙 치열했기에 네트워킹을 통해 자기 PR을 하지 않는 경우 인터뷰를 받기가 힘들었다. 오죽했으면 경영대의 커뮤니케이션 수업에서 '선배에게 답장률을 높이는 이메일 작성법'을 가르쳐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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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들은 보통 졸업생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해 놓는데 여기에는 선배들의 졸업연도, 근무회사, 그리고 이메일과 같은 개인정보가 기록되어 있었다. 그리고 재학생들은 네트워킹을 위해 데이터베이스에 기록된 정보들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었다. 눈치가 빠른 학생들은 학기초부터 관심 있는 회사들을 중심으로 현재 근무 중인 선배들의 이메일 주소를 엑셀로 정리했고, 기업설명회가 시작될 무렵에는 이미 각 산업별로 정리된 여러 목록들이 학생들 사이에서 돌아다녔다.

이력서와 커버레터, 그리고 엘리베이터 피치가 준비되면 그때부터는 데이터베이스를 활용해 이메일을 돌려야 했다. 이메일을 보내는 유일한 목적은 선배들과 짧은 전화통화를 하는 것이었고, 짧은 전화통화는 결국 내 이름을 선배들에게 각인시키기 위해서였다. 긴 내용은 아니었지만 중요한 이메일인 만큼 몇 번이나 수정한 후에야 겨우 발송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이력서가 좋고 이메일을 잘 썼더라도 상대방이 답장을 하지 않는다면 소용이 없었다. 그래서 이를 방지하기 위해 이메일을 받는 선배와 어떻게든 연결고리를 찾으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조금이라도 연관된 사람이 보낸 이메일은 답장을 할 확률이 높았기 때문이다. 사실 같은 학교를 나왔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큰 유대감을 형성할 수 있었지만 취업시즌에는 이것보다 더 특별한 연결고리가 필요했다.

가장 답장률이 높았던 방법은 mutual 친구의 소개였다. 예를 들어 4학년 친구 중에 해당 회사에 다니는 선배를 아는 사람이 있다면 이 친구에게 부탁해 선배에게 소개 이메일을 써달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 외에도 고향이 같거나 같은 동아리 출신이면 도움이 많이 됐다. 너무 오버하는 것도 우습지만 연결고리를 찾을 수만 있다면 답장이 올 확률도 높았고 또 통화연결 후에도 대화할 거리가 더 많았기에 훨씬 유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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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배님 반갑습니다. 목요일 오후 6시에 시간이 날 것 같네요. 그때 통화할까요?"
이메일을 보내기 시작한 지 며칠이 지나자 답장이 오기 시작했다. 이메일마다 답장을 하고 약속된 통화 시간을 선배의 이름과 전화번호 그리고 근무하는 은행과 함께 구글 캘린더에 입력했다. 통화 길이는 업계마다 조금씩 다를 수도 있지만 투자은행의 경우 15분이 적당했다. 취업 막바지에는 하루에 여러 명과 통화를 한적도 있었는데 이럴 경우 통화가 길어질 수도 있기에 서로 30분씩 간격을 두고 스케줄을 잡았다.

통화 시간 전까지는 해당 은행에 대한 기본조사를 했고 내 이력서에 적힌 내용들을 훑으며 복습했다. 가장 중요한 내 엘리베이터 피치는 빈 종이에 적어가며 다시 연습했다. 그러다 통화 10분 전부터는 조용하고 전파가 잘 터지는 장소를 찾아서 종이와 펜을 놓고 대기했다. 간혹 가다 나보고 직접 전화를 하라는 선배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내 번호로 전화를 하겠다는 경우가 많았다.

정확히 6시가 되자 내 핸드폰에 모르는 뉴욕 번호가 떴다.

나: 안녕하세요 미네르바입니다. Charles 선배님 맞으신가요?

선배: 네 맞아요. 요즘 리크루팅 시즌이죠? 후배들한테 오랜만에 연락받으니 너무 반갑네요.

나: 바쁘실 텐데 시간 내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일단 간단하게 제 소개를 먼저 해볼게요. [준비한 엘리베이터 피치 시작].

선배: 한국에서 왔다고요? 군대도 갔다 오고 특이한 배경을 갖고 있네요. 제 소개를 간단히 해볼게요. [선배가 짧게 자기소개]. 오늘 제가 어떻게 도와줄 수 있을까요?

나: 선배님의 소개를 들으며 궁금한 게 하나 있었습니다. 인턴은 bulge bracket 은행에서 하셨는데 졸업 후에는 부티크 은행에서 일을 하시네요. 어떻게 그런 결정을 내리셨는지 좀 듣고 싶어요.

선배: 좋은 질문이네요. 사실 큰 은행도 여러 가지 면에서 좋았어요. 일도 많았고 또 그만큼 많이 배우기도 했고요. 다만 마음에 하나 걸리는 게 있었다면 은행이 큰만큼 업무가 굉장히 세분화되어있었기에 제가 하는 일 말고 다른 분야를 경험하기가 힘들었어요.

인턴이 끝난 후 해당 은행에서 오퍼를 받을 수 있었기에 약간 고민이 되긴 했지만 다양한 업무를 경험할 수 있는 부티크 은행에서 커리어를 시작하고 싶었고, 지금은 결정에 만족하며 회사에 다니고 있습니다.

나: 그렇군요. 지금 계시는 은행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부분이 뭔지 여쭤봐도 될까요?

선배: 음... 몇 가지가 있기는 한데 아마 하나를 꼽으라고 하면 작은 조직인만큼 제 책임의 범위가 더 크고 또 그렇기에 업무를 더 빨리 배울 수 있는 점이 있겠네요.

나: 제가 부티크 은행에 관심이 있던 이유 중 하나인데 그 부분을 확인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보통 뉴욕에서 주말에 시간이 나면 어떻게 보내시나요?

선배: 하하 잘 알겠지만 업무가 바빠 안타깝게도 일을 하는 경우가 많아요. 하지만 일을 안 할 때는 맛있는 것을 먹으러 가거나 아니면 친구들이랑 놀러 다니죠.

나: 그렇군요. 저는 뉴욕에서 한 번도 살아본 적이 없기 때문에 만약 갈 수 있게 된다면 그런 생활이 조금 기대가 됩니다. 오늘 통화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정말 도움이 많이 됐어요. 혹시 제가 얘기를 나눌만한 선배들이 지금 계신 은행에 또 있을까요? 만약 당장 생각이 안 나시면 나중에 이메일로 천천히 보내주셔도 되고요.

선배: 저희 그룹에는 없는데 다른 그룹에는 몇 명 있어요. 제가 나중에 이메일로 연락처를 보내줄게요.

나: 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선배: 행운을 빕니다!




대부분의 통화는 저런 식으로 진행이 됐다. 내가 자기소개를 하면 선배들도 간단히 자신을 소개한 후 질의응답으로 이어지는 식이었다. 물론 가끔 나에 대해 더 물어보기도 했지만 걱정했던 것과 달리 이력서에 쓰인 내용을 꼬치꼬치 캐묻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50개의 이메일 중 전화 통화로 연결된 사람이 약 30명 정도 됐었는데 곤란한 질문을 받은 적은 딱 한 번 밖에 없다.

통화로 연결된 선배께 근무하시는 은행에 관심이 많다고 했더니 "그래요? 그럼 저희가 최근에 한 프로젝트 중 어떤 게 가장 인상적이었나요?"라고 선배가 물어본 적이 있었다. 대답을 했는데 하필 내가 얘기한 것이 본인이 직접 담당했던 프로젝트였던 것이다. 이어지는 세세한 질문에 나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됐고 그 은행으로부터는 당연히 인터뷰를 받지 못했다.

반대로 예상했던 것보다 전화통화가 훨씬 더 수월했던 경험도 있다.

당시 투자은행 외에도 컨설팅 회사와도 몇 군데 네트워킹을 진행하고 있었다. 컨설팅 회사에 다니는 선배 하나와 평일 밤늦게 전화를 한 적이 있었는데 서로 얘기가 너무 잘 통하는 바람에 1시간도 넘게 대화를 했다. 회사에 대한 질문뿐만 아니라 인생철학과 10년 뒤의 꿈같은 거창한 얘기들도 거리낌 없이 나눴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해당 회사로부터는 당연히 인터뷰를 받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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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업과 네트워킹을 병행하는 것은 굉장히 많은 시간이 들었고 생각보다 힘들었다. 가끔은 이렇게 힘든 네트워킹이 과연 얼마나 중요할까라는 의문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많은 도움이 됐던 것 같다.

투자은행에서는 서류전형 통과자를 뽑을 때 대학별로 팀이 모여 인사과 사람들과 함께 이력서를 검토한다. 1차 인터뷰 슬롯이 24명이라면 첫 10명 정도는 이력서만 봐도 튀는 학생들이 있기 때문에 고르기가 쉽다. 하지만 나머지 14명은 조금 다르다. 여기서부터는 애매한 사람들도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이력서에 적힌 객관적인 정보로만 판단하기 어려울 때 사람들의 주관이 들어가게 되고 네트워킹의 진정한 힘이 발휘된다.

"아 그 친구? 나 예전에 통화해봤었는데 예의도 바르고 말도 잘하는 거 같던데?"

"아 맞아! 나한테도 전화했던 거 같아. 나도 인상 꽤 좋았어."


만약 토론을 하던 중 이런 식으로 누군가 나서서 특정 학생을 지지해준다면 특별한 이유가 있지 않은 이상 남들도 동의하게 되어있다.

물론 본인이 학점도 만점이고 동아리와 인턴경력 모두 빵빵한 완벽한 이력서를 갖고 있다면 굳이 이렇게 네트워킹을 안 해도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지원자가 몇 명이나 될까. 그렇기에 선배들 중 내 아군을 최대한 많이 만들어놓는 것이 중요하다.

종이로 봤을 때 동등한 실력이라면 결국 언제든지 정성이 이기게 마련이다. 그리고 그 마음은 한국이나 미국이나 마찬가지인 듯하다.


월가를 들어가며:

프롤로그 (01) / 3학년 가을학기 (02) / 위험한 구애활동 (03) / 3분짜리 이야기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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