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히 개인적인 밤

By @cagecorn1/18/2018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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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밤이 있다. 오늘은 해야지, 오늘은 꼭 해야지. 오늘은 내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밤이야. 라고 당차게 '글쓰기'버튼을 누르지만, 결론적으로 하지 못 하고 결국 그림과 몇 가지 유머를 아무렇게나 뒤섞은 그릇 하나를 탁자에 내려두고 쓸쓸히 퇴장하는 밤. 시간이 지나고 재료가 자연스레 녹아 밑으로 가라앉으면 자기네들이 알아서 뒤섞여 특유의 아무 향이나 내뿜길 바라는 밤.

글이라는 건 내겐 아직 어렵다. 글은 그림과 다르다. 그림은 은유적이다. 그림으로 나의 감정, 느낌을 고스란히 담을 수 있지만 그것은 구체적이지 않다. 그림을 통해 그 사람은 나의 마음에 공감할 수 있지만, 내가 왜 그런 고통을 느껴야 했는지, 왜 그런 상황에 놓였는지에 대해선 알 길이 없다. 그 말은 그림은 어떻게 보면 가장 완벽한 가면이다. 가면 속에 숨어서도 여전히 내 감정에 대해 노래 할 수 있다. 완벽한 분출구인 동시에 근사한 위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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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겐 시를 쓰는 솜씨가 없다. 시를 쓸 줄 몰라서 그림을 그리게 되었나 보다. 나는 나의 감정과 고통을 해소할 곳, 승화할 곳이 필요했고 그림과 만화는 내게 충분한 비상구가 되었다. 열심히 펜을 놀리다보면, 나는 나 자신의 상황과 처한 고통으로 부터 잠시 멀어져, 내 머리 위에 둥둥 떠나니게 된다. 둥실둥실 뜬 상태에서 나 자신을 돌아보고, 앞으로 가능성을 점쳐본다. 그림 그리기 시간이 끝나면 나는 다시 내 육체로 돌아오게 된다. 고통과 부정이 가득한 내 인생. 하지만 그것은 끔찍한 행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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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는 왜 우울한가? 라는 포스팅을 쓴 적이 있다. 어쩌면 나는 왜 우울한가?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그럴 용기가 없어 최대한 은유적이면서 딱딱한 문체로 돌아서 갔나보다. 돌아서 들어간 곳에 영광은 없었다. 들어줄 이 없는 방에 들어가 고해성사를 해도, 아무도 나의 죄를 사하여 주지 않는다. 나는 내가 이 '미래'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고통의 숲을 지나쳐가야 했음을 잘 알고 있다. 가시가 사방에 돋힌 무채색의 정글. 그 길을 거치지 않았다면 지금의 영광이 없다는 걸 알기에. 죄를 짓지 않은 이는 고해성사를 할 필요도 없다. 고해성사를 할 필요가 없다면 고뇌할 필요도 없고 불행할 필요도 없고 그림을 그릴 이유도 없어진다. 그런 '과거'가 없다면 지금의 '현재'가 없다. 그게 사실임을 너무나도 잘 알고 이해한다는 사실이 끔찍한 것이다. 끔찍해서 가끔은 누군가를 저주하고 싶지만, 여전히 목적어가 없다. 목적어가 되어줄 만한 단어가 없다. OOO? XX?나 자신? 나 자신이란 목적어는 생각보다 괜찮은 먹잇감이다. 저항도 못하고 체력도 바닥이 나지 않는다. 스스로를 갉아먹는 행위는 긴 시간동안 되새김질을 반복한다. 끝나지 않는 우로부로스의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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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밤마다 고해성사를 하러 가는 곳은 신부가 기다리는 곳이 아니었다.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차갑고 네모난 흰 벽. 그 안에 흠뻑 빠져들고나면 어느새 근사한 그림 한 장이 완성되기도 하였다. 그 유희는 썩 유쾌한 것이었다. 아무도 들어주지 않아도, 아무도 해답을 제시하지 않아도 행위 자체만으로 의미가 있었으니까. 눈에 보이는 실체가 있었다.

내겐 글을 쓰는 재주가 아직도 없다. 평생 없어야 할런지도 모르겠다. 글을 쓰다보면 내 이야기, 내가 어떤 일을 겪었고 어떤 상태에 있었는지에 대해 남에게 떠들지도 모른다. 사실, 남들이 듣기엔 별로 대수롭지 않은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고통을 겪지 않은 이가 이 세상에 어디있겠는가. 누구라도 그런 일은 살면서 겪게 된다. 단지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 승화한지는 각기 다른 것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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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나는 나의 그림에 대해 언제나 감사하다는 것이다. 내게 이런 재능이 있고, 이런 선택을 비교적 일찍 내린 것에 대해서. 쉬지 않고 노력한 것에 대해. 아픔을 잊기 위해 이곳으로 도망친 것에 대해. 그리고 그 선택을 단 한 번도 후회하지 않은 데에 언제나 고마워하고 감사한다. 자학과 자기 위로가 수 만번의 선을 그으며 관통하며 교차했다. 결론적으로 썩 괜찮은 천감이 완성되었다.

그리고 고마워 할 것이 있다면 나 자신을 이 스팀잇이라는 새로운 세계로 데려다 준 나의 작은 운, 행운이다. 전혀 다른 정보를 얻기 위해 했던 구글 검색이 네게 이런 기회와 인연, 추가적인 부를 가져다줄 줄 꿈에나 상상했겠는가? 운이란 건 가끔 너무 재밌다. 간절히 원하던 것들은 눈앞에서 조롱하듯 뒤흔들며 가져가버리고, 전혀 상상하지도 못한 그러나 은연중엔 느끼고 있던 반짝반짝 빛나는 작고 작은 소망들을 어느날 떡하니 가져다 놓고 홀연히 사라져 버린다. 고맙다는 인사는 듣기 싫다는 듯이 말이다. 혹은 언제 다시 돌아와 그것도 회수할 것을 알기에 정을 붙이기 싫은 걸지도.

나는 이곳에서 그림을 올린다. 정작 하고 싶은 이야기는 있지만 그것을 앞치마 속으로 감추며 아무렇게나 버무린 재료와 소스들을 그릇에 담아 손님들에게 대접한다. 적당히 시간이 지나면 재료들이 밑으로 가라앉으며 알아서 특유의 향을 풍기길 바라며. 아직까진 손님분들이 만족하는 모양새이다. 그렇다면 나도 아직까지 이곳에서 괜찮은 모양이다. 어떤 분들은 팁을 두고 가기도 한다. 칭찬의 의미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 팁이 모이고 모이면 내가 상상도 못한 대가로 돌아오기도 한다. 그 팁의 현실적인 가치를 정하는 흐름 자체는 나의 노력이나 센스로 조종하는 것이 불가능 하지만. 팁의 존재 자체는 내게 커다란 위안이 된다. 과거에는 꿈에도 못 꿀 소중한 자유를 행사 할 수 있는 골든티켓.

앞으로도 나는 꾸준히 이곳에 와서 손님분들을 대접하기 위해 노력하겠지. 어떤 분들은 나와 더욱 친해지게 될 것이다. 그런 분들에게 나 자신에 대해 드러내고 싶진 않다. 내 음식을 통해서 나의 인생을 추측해주길 바라는 걸까? 나의 마음을 알아주길 바라는 유치한 마음과 그것을 가려야 한다고 스스로를 다그치는 성숙한 마음은 언제나 충돌한다. 밤마다 그 작은 연극을 보는 것은 재밌다. 새벽 감성이 충만해지면 수많은 논쟁을 벌이는 나의 자아들. 결론은 역시나 '그만하고, 그림 몇 장 올리고, 자러 가자. 다들 수고했다.'라고 말하는 이. 하지만 오늘 밤만은, 오늘 밤만은 다른 자아가 말한다. '알듯말듯 아리송한 글 하나 정돈 괜찮지 않을까? 내 가게의 평판을 깎지도 않고 앞으로 내줄 음식에도 그다지 영향을 주지 않을 거야. 오늘 밤 하루만. 오늘밤 하루만 개인적이 되어보자.'

항상 이 곳을 감사한다. 이 곳에서 얻은 것들을 감사한다. 하지만 나는 시간적 여유가 부족하다 보니 남들에게 베풀 수가 없다. 베풀질 않는다. 나는 개인적이고 이기적이니까. 그래서 이런 감사 인사인지 아닌지 모를 요상한 글만 남기게 된다. 내일은 다시 평소로 되돌아갈 것을 알면서. 해외에 거주하시는 분들에겐 통하지도 않을 '지금은 새벽이니까요?'라는 핑계를 둘러대면서.

이런 식으로 나 자신을 조금 내비치는 게 마치 못 다한 보답을 대신할 수 있을 것이라는 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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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런 뭐시기한 글엔 덧글 안달아주셔도 됩니다^^ 읽어주신 것만으로도 감사! 아, 버스승강장에 백원 붙인거 저 아닙니다-.-;;;; 어떤 꼬맹이가 크리스마스에 붙여두었더니 한참동안 아무도 안 가져 가더라구요, 그게 웃겨서 찍어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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