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로받고 싶을 때,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대학생 시절의 얘기다. 아빠와 크게 말다툼을 한 적이 있다. 정확히 뭐 때문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언제나 그렇듯 나는 나를 이해해주지 못하는 아빠가 답답했고, 아빠는 세상 물정 모르는 철부지 딸이 걱정됐을 것이다. 그날 저녁 친구와 약속이 미리 잡혀 있지 않았더라면 아마 아빠와 나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서로 돌아가며 잔소리 투척과 대들기를 끝도 없이 반복했을지도 모른다. 아빠와 싸우고 잔뜩 심기가 불편해진 상태로 집을 나선 나는 그나마 오늘 친구와 약속이 있었던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를 만나서 수다를 떨면 아빠와의 싸움으로 지친 마음에 위로가 될 것 같았다.
싸움의 여파로 씩씩거리며 약속장소에 도착했는데 아직 친구가 오질 않았다. 나는 친구를 기다리며 가만히 아빠와의 일을 곱씹어봤다. 왜 나를 이해해주지 않으시는 걸까. 나도 이제 어른인데, 왜 내 의견을 존중해주지 않으시는 걸까. 생각할수록 억울했고, 어서 빨리 친구에게 이 마음을 하소연하고 싶었다. 친구가 내 마음을 다독여준다면 기분이 많이 풀릴 것 같았다.
그런데 친구를 보자마자 다짜고짜 “우리 아빠가~” 하면서 말을 꺼내는 건 좀 모양새가 없어 보였다. 쪼르르 달려가서 일러바치는 꼬맹이도 아니고. 나도 이제 대학생인데, 내 위신을 생각해야 했다. 친구가 알아서 아빠 얘기를 꺼내주면 제일 좋겠지만, 둘이 만나서 얘기하다가 느닷없이 아빠 얘기가 주제로 나올 것 같지는 않았다. 그때 기가 막힌 방법이 떠올랐다. 친구가 먼저 물어보게 만드는 거다.
내 전략은 이랬다. 나는 우선 세상 근심 다 짊어진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거다. 그러면 아무리 둔한 사람이라도 얘한테 무슨 일이 있구나,하고 생각할 테니까. 친구가 나한테 “왜 그래? 무슨 일 있니?”라고 물어보면 그제야 못 이기는 척 “아니, 별 건 아니고. 아빠가 말이지~” 하면서 말을 꺼낼 심산이었다.
친구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나는 친구를 기다리며 머리 속으로 시뮬레이션을 여러 번 돌려봤다. 내가 이런 표정을 짓고 있으면 친구가 왜 그러냐고 묻겠지. 그럼 나는 아빠와 싸운 얘기를 꺼내는 거야. “니가 생각해도 말이 안 되지 않니?”하고 씩씩거리면 친구는 어느 정도 맞장구 쳐주다가, “니가 이해해. 아빠잖아.”하며 위로해줄 거다. 좋았어. 완벽해.
그런데 예상치 못한 복병이 있었다. 머리 속으로 이런 저런 대사를 바꿔가며 반복해서 상상하다 보니, 마치 내가 아빠 뒷담화를 하는 것 같아서 마음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이건 어디까지나 내 마음을 위로받고 싶어서 하는 건데, 꼭 아빠 흉을 보는 것 같아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사실 아빠가 날 미워해서 그러시는 건 아니잖아? 나랑 의견이 다른 것뿐이지. 아빠가 날 사랑하신다는 건 나도 잘 알고 있으니까.’ 내가 오히려 머리 속에서 아빠를 옹호하고 있었다.
게다가 상상 속이었지만 친구가 해줄 가상의 위로까지 여러 번 듣다 보니 집을 나섰을 때 화가 났던 마음도 많이 풀어져 있었다. 기분도 풀렸는데 친구한테 말하지 말까? 잠시 망설이긴 했지만, 그래도 친구가 해주는 위로의 말을 상상이 아닌 실사판으로 듣고 싶었다. 나는 내 전략을 밀어붙이기로 했다.
그때 나는 꿈에도 몰랐다. 내가 예상치 못했던 진짜 복병이 숨어 있었다는 걸.
드디어 친구가 도착했다. 우리는 패스트푸드점에 들어가 햄버거를 사들고 테이블에 앉았다. 반갑게 말을 거는 친구와 달리 나는 최대한 계획했던 대로 움직였다. 걱정거리가 가득한 얼굴로 친구의 말에 가능한 짧고 시무룩하게 대답했고, 친구의 시선을 피하고 테이블만 바라보기도 했으며, 때에 맞춰 한숨을 쉬어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즐겁게 말을 이어가던 친구가 잠시 말을 멈추더니 나를 지긋이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옳거니, 미끼를 물어버렸구만!
“사람이 화가 났을 때는 화를 내지 말고 자기가 화가 났다는 걸 얘기해야 된대.”
어라, 내 얘기를 듣기 전에 조언부터 해주네? 나는 아무런 대꾸없이 친구의 말을 경청했다.
“상대방한테 왜 화가 났는지 설명해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니까. 그냥 화를 내버리면 싸움밖에 안 나잖아.”
아, 그렇구나. 나는 아빠와 나를 떠올렸다. 내가 아빠한테 화를 내지 말았어야 했나? 내가 화가 난 이유를 차근차근 설명했어야 했나? 그랬다면 아빠와 싸울 일도 없었을까? 나는 지금이 아빠 얘기를 꺼내고 위로를 받을 적기라고 생각했다. 짧게 한숨을 내쉬고 말을 꺼내려는데, 친구가 먼저 선수를 쳤다.
“내가 약속시간에 늦게 와서 화가 난 거면, 그렇다고 말을 해. 이렇게 화내고 있지 말고.”
눈치 없고 둔한 나는, 약 3초간의 정적이 흐른 후에야 비로소 모든 상황이 파악 되었다.
내 작전은 처참하게 실패했다. 아빠 얘기는 꺼내 보지도 못했고, 내 앞에는 굳은 표정의 친구가 앉아 있었다. 나는 ‘내가 친구가 늦게 와서 화가 났으면서도 화가 났다고 말하지 않고 화를 내고 있다’고 오해해서 기분이 상한 친구를 달래주어야 했다. 여기에 오기 전에 아빠와 잠깐 말다툼을 해서 기분이 가라앉았었는데 그것 때문이라고, 너와는 상관없다고. 나는 친구에게 ‘난 절대로, 결단코 너에게 화가 난 게 아니다’라는 사실을 주지시키기 위해 애썼다. 다시 친구의 눈을 바라봤고, 미소를 띠었으며, 친구의 말에 좀더 높고 밝은 톤으로 대꾸했다.
우리 분위기는 다시 화기애애해졌고, 아빠의 얘기를 하소연하는 건 물 건너 갔다.
친구와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 발걸음은 집을 나설 때보다 한결 가벼워져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머리 속에서 돌린 여러 번의 시뮬레이션으로 이미 아빠와는 마음 속으로 화해를 했고, 친구의 오해도 풀렸으니까. 그런데 이상하게도 마음 한 켠이 자꾸 싸했다. 이젠 아빠한테 화났던 것도 누그러졌고, 친구하고도 즐거운 시간을 보냈는데, 왠지 모르게 기분이 우울해졌다.
아, 내가 우울할 땐 누가 나를 위로해주지?
…여..러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