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아버지, 아니 그당시 남친의 아버지는 다정한 사람이었다. 너무 다정해서 그 다정이 흘러넘치는 그래서 다정하지 않는 사람까지 옆에 앉았다가 자기도 모르게 다정해 지는 그런 류의 다정함 이었다. 내가 다정하고 싶으면 그 다정함을 받는 상대방의 불편함은 크게 신경 쓰지 않는 쪽이었다.
남자친구는 내가 올라가지 않는 달에 집으로 내려왔다. 아버지는 우리가 만나러 나갈 때면 항상 본인도 함께하기를 원하셨다. 보통은 아버지 어머니와 같이 밥을 먹거나 영화를 같이 보러다녔다.
내 기억에 ‘집으로’, ‘웰컴 투 동막골’ 등등의 영화도 같이 봤었던 것 같다. 그 영화를 떠올리면 내 옆에서 연신 눈물을 흘리던 그당시 남자친구의 어머니 모습만 떠오를 뿐, 그 영화들의 내용은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우리나라 영화 역사상 가장 화제작으로 꼽히는 그런 영화들의 내용이 전혀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나는 그 자리가 신기했고, 세상 처음 느껴보는 부모님들의 사랑과 다정함을 내 모든 물리적 정신적 에너지를 동원해 해석해 내고 있었다. 영화 한 편이 끝나고 나면 마라톤을 다 뛴 사람모냥으로 녹초가 될 만큼 그 상황이 불편하고 어색했지만, 남자친구의 표정은 밝았으므로, 나도 그러한 것들을 자연스럽게 받아 들이려고 노력했다.
그냥 둘만 있고 싶었다. 종목을 바꾸면 안 따라오실까 해서 탁구를 치러 간다고 해도 따라 나오시고, 집으로 나를 데려다 주는 길에도 굳이 동행하셨고, 심지어 어떤 날은 당신이 직접 데려다 주시겠다며 남자친구를 집으로 먼저 보내신 적도 있다. 그즈음 나는 그분들의 다정함에 취해서 거의 나가 떨어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상견례를 하고 결혼 날짜가 따박따박 다가오던 어느날, 나는 서울 본사 발령을 앞두고 아시아 국가 지사들에 나가 있는 직원들에 대한 교육일정을 소화하고 있었다. 거의 한 달 넘는 교육이 끝나고 김해공항에 도착한 시간은 거의 밤 9시가 다 되어 가는 시간이었고 휴대폰 전원을 켜자마자 남자친구의 다급한 문자한통이 배달되어 있었다.
“아빠가 너 데리러 공항에 나가신대... 미안...ㅜㅜㅜ”
이미 신체적 공황상태는 와 있었고, 그 문자를 받는 순간 더이상 못해먹겠다 싶었다. 그리고 문자 한 통을 보냈다.
“미안해... 나 진짜 못하겠어. 나 택시타고 가. 이제 그만하자. 나 너랑 결혼 못해”
진심이었다.
진심으로 나는 그분들의 그 다정함을 받아들일 그릇이 못되었다. 처음 아버지라는 분을 소개 받았을 때의 그 황홀감, 딸들과 농담을 주고받고 시시때때로 문자를 주고 받던 아버지, 환갑을 앞둔 어느날 당뇨 증세로 입원한 아버지를 위해 딸들이 준비했던 케잌과 손편지와 사랑과 존경의 포옹들, 그리고 그림을 그리고 도자기를 만들어 곧 며느리가 될지도 모르는 아들의 여자친구를 살뜰히 챙기는 어머니의 따뜻함...
그 모든 온화하고 완벽한 다정함들이 지긋지긋해 지는 시간이었다.
그분들의 다정함은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만들어도 본인이 좋으면 되는 다정함이었다. 다정함을 행하고 그 행함이 자신들을 만족시키면 그 다정함을 당하는 사람도 더 업그레이드 된 다정함을 원해야 하는 그런 다정함이었다. 다정도 병이 될 수 있다는 것, 그래서 나는 다정병 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냈다. 만약 그 다정함의 정도가 신체 내에서 물리적으로 존재해야 한다면, 마치 그것이 오줌과 같은 액체 상태로 일정기간 체내에 차면 밖으로 배출되어야 할 종류의 것이라면, 남들은 일년에 한번 비워낼 양을 비워내느라, 하루종일 화장실을 들락거려야 하는 그런 정도의 다정함 이었다.
변한 건, 그분들이 아니라, 나였다는 것을 나는 그때는 몰랐다. 아니 알면서도 모른척 했다.
처음에는 그렇게 좋아 보이던 모든 것들이, 제 3자의 입장에서 보던 시선을 거두고 이제는 제 1 당사자가 되어, 가족의 시선으로 옮겨가야 할 그 중요한 시점에, 나는 그제서야 반항하기 시작했다.
결혼은 예정대로 진행되었다.
가족모임이 너무 잦아서 핸드폰을 꺼놓고, 아침 저녁으로 전화하시는 그 정성이 부담스러워 아예 집 전화를 없애 버렸고, 수시로 찾아 오시는 통에 현관문 카드키 번호를 몇 번이나 바꿨다.
나는 점점 못된 며느리가 되어갔다.
가족 식사 자리에서, 갈비탕 고기 덩이가 아버님 국그릇에서 아들 국그릇으로, 아들 국그릇에서 어머님 국그릇으로, 어머님 국그릇에서 내 국그릇으로 오는 순간 이동이 멈춰버리는 날이 잦았다.
내 어깨를 툭툭 치시며 아버님께 고기쌈 하나 싸서 입에 넣어드리라는 말을 못들은 척 하기 시작했고, 아버님 앞서 걸어 나가시는데 팔짱이라도 끼고 가라고 하시는 어머님 말씀에 대꾸하지 않는 날이 늘었다.
점점 나는 못되고 말없는 며느리가 되어갔다.
아버님 어머님 전화를 피했고, 시댁식구들 모임에 나가지 않기 시작했다. 그런 나를 가족들이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시기에 신랑이 이 곳으로 파견을 나왔고 자연스레 나도 이곳으로 오면서 거의 연락이 끊겼다.
거의 3년이었다. 아버님 어머님께 연락을 드리지 않은 기간이. 그러던 중에 신랑의 누나들, 그러니까 나에게는 시누이가 되는 분들이 가족들과 이곳으로 여행을 오셨다.
그분들과는 좋게 지냈었다. 큰누나 둘째누나, 그리고 막내 여동생까지 나이대도 비슷하고 그 매형들까지도 다들 좋은 분들이라 한국에 있을 때 가끔 만나 술도 한잔씩 하던 사이였다. 직장생활과 육아문제로 극도로 스트레스를 받던 와중에 터져버린 나의 마음을 어떻게 단도리 하지 못해 생겨버린 가족간의 생채기는 누가봐도 내가 매꿔야 할 내 몫이었다.
“나도 우리아빠 유난 스러운거 알아, 아는데...”라며 큰언니는 눈시울을 붉혔다.
그날 밤 마닐라의 한 술집에서 나는 내가 떠나와 후련했던 날들 동안의 그분들의 우울과 박탈감에 대해 들었다. 영문을 알 수 없어 하시는 부모님들은 모든게 당신들 잘못일 거라며 그저 그 못된 며느리를 감쌌다고 한다. 뭐 딸들이니 그리 말할 수 밖에 없겠지만, 욕을 먹었어도 어떡하겠나, 나는 진짜 못된 며느리였는데....
그 이후 기적적으로 둘째를 가졌고, 둘째 소식을 들으신 시부모님은 마치 그동안의 모든 앙금은 둘째 하나로 다 해결된 듯, 아니면 딸들이 며느리 이제 다~ 풀렸으니 연락해 보라는 언질이 있었던지, 천천히 연락을 해 오셨다. 우리 둘째가 태어나고 아들이란 연락을 받으시고는, 아~ 본인들은 또 딸이었으면 했는데 아들이라 너~무 서운하다는 안해도 되는 말씀을 또 굳이 하셨다.
둘째가 백일 되던 때에 마닐라에 놀러도 오셨다. 며느리 좋아하는 가방도 면세점에서 사오셨다.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가신 후 부터는 거의 매일 또 연락하셨다. 내가 화답이라도 하는 날엔 카톡에 불이 날 정도로 사진을 보내신다. 풍경 사진, 명언이 담긴 사진, 한국의 가족들 사진... 그리고 본인의 셀카 사진 서너장으로 방점을 찍으신다ㅜㅜ
아이들을 너무 사랑하시니 그부분에 늘 감사하게 생각한다. 내가 연락을 끊은 3년동안도 우리 딸 생일 입학 크리스마스 어린이날 하나 안빠지고 챙기셨고, 둘째가 태어나고 젖을 때고 분유를 때자 마자, 아빠 출장 길에 따라 시댁에 보내면, 한 일주일은 두분이서 물고 빨다가 미끈하게 만들어서 보내주신다. 엄청난 양의 선물과 함께.
아이가 말이 서툴러서 이제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의 영어를 구사하니 재작년 놀이터에서 바지에 똥을 한 번 싸더니 그다음부터는 절대 아빠따라 혼자 가지 않는다. 그래서 할머니 할아버지는 애가 닳는다. 페이스톡에 보이스 톡에 애랑 얼굴 한번 마주치겠다고 안간힘을 쓰시지만 아이들은, 한국 갈때나 이 곳에 친척들이 방문할 때만 뿅 하고 나타나는 이모 고모 할머니 할아버지에 별로 정을 못 느끼는 듯 하다.
그래서 아버님께 아이들 사진을 자주 보내 드리는데, 그럴 때 마다 본인의 스냅쳇으로 화답하신다.
시아버지 셀카 사진 정기적으로 받는 사람~? 손들어 보기......
신랑에게 이야기 한 적이 있다. 왜 부산행에 좀비들 있지 좀비들? 아버님이 좀 그런거 같애... 문이 닫혀 있으면 밖에서 어슬렁 어슬렁 거리다가, 문이 열리면 후다다다다다다다다다닥~~!!!
웃자고 한 말에 신랑은 죽자고 화를 내고, 다시는 그런말 입에 담지 않는다. 내가 잘못했다 인정한다. 못된 며느리...
여전히 그때를 생각하면 죄송하지만, 다시 돌아가더라도 잘해낼 자신은 없다 솔직히.
그런데 내가 잊고 있었던 한가지는, 그분들은 단 한 번도 나를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다는 것이다.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잘 먹는다고, 사랑도 많이 받아보고 해 본 사람이 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변을 해 보자면, 조금만 내게 시간을 주었더라면... 아마 이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았을텐데. 저기 저~ 멀리서 가족이라는 원 안으로 자박자박 걸어오는 나를, 손을 뻗어 홱 낚아채 원 안으로 들여 놓지만 않았더라면 나는 아마 정상적인 시간과 노력으로 자연스럽게 가족이 되었을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이만, 못된 며느리 이야기 마칩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많은 아들분들, 저를 욕하지 마세요. 저는 나쁜 사람이 아닙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