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의 정원

By @applepost5/10/2018kr-pen


어버이날이라고 작은 카네이션 바구니 하나를 들고 할아버지 댁에 갔다. 맛있는 거 드시러 가자는 아빠의 말에 할아버지는, 근처 사는 할머니를 데리고 가고 싶다 하셨다. 혼자 사시는 할아버지와 잘 지내시는 분인 것 같았다. 귓불이 늘어질 정도로 큰 귀걸이를 하고 손톱에 빨간 매니큐어를 칠한 할머니는 올해 아흔다섯이었다. 할아버지가 누님이라 하며 좋아하는 분이라 했다. 

함께 오리 백숙을 먹으며 빨간 매니큐어의 할머니는 엄마를 붙잡고 하소연했다. 아침마다 눈을 뜨면 왜 하늘이 날 데려가지 않았는지 한탄한다고. 그런 말씀이 무색할 정도로 할머니는 유쾌했다. 예전에 장사를 했었는데, 그 구역에서 왕초였다고 당신을 소개했다. 할아버지는 그 이야기에 덧붙여 “생긴 것만 여자지, 남자나 매한가지야.”라고 하셨다. 할머니는 호탕하게 웃으셨다. 얼마 전엔 딸과 해외여행을 다녀왔는데 가이드에게 팁을 주니 멋쟁이란 소릴 들었다고 했다. 

점심을 먹고 엄마, 아빠, 할아버지는 왕초 할머니를 모셔드리러 가고 나만 먼저 할아버지 댁으로 돌아왔다. 전기장판 위에 앉아 TV를 켰는데 귀가 아플 정도로 큰 음량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이내 TV를 끄고 한쪽 팔을 괴고 옆으로 누웠다. TV 바로 옆에 돌아가신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찍은 사진이 보였다. 



할머니는 다시 태어난다면 우리 엄마의 자식으로 태어나고 싶다고 했다. 그렇게 말씀하시던 모습이 선명하게 기억난다. 암 수술 이후 몸이 안 좋아지셔서 병원에서 지내시다가 잠깐 우리 집에 계셨을 때였다. 그때 하신 말씀들이 종종 영상처럼 재생된다. 

가을이었다. 나뭇잎이 떨어지는 걸 보고 할머니는 말씀하셨다. “나무들은 얼마나 좋아, 저렇게 떨어져도 또다시 잎이 나고.” 할머니는 아마도 당신이 세상을 떠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알고 계셨던 것 같다. 돌아보니 그렇다. 

또, 봄이 오면 얼굴의 잡티를 빼고 싶다고 하셨다. 나는 할머니가 적어도 몇 번의 계절을 더 사실 거라고 생각했다. 잡티를 없애고 싶다는 말이 정말 강력한 생의 의지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사람의 숨 같은 건 의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건지, 할머니는 그해 가을을 넘기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할머니는 평생 몸이 편치 않으셨다. 겔포스, 판피린 같은 걸 달고 사셨고 병원에도 자주 다니셨다. 아빠가 어렸을 때는 아빠가 결혼할 때까지만, 결혼하고 나서는 손주를 볼 때까지만, 내가 태어나고는 내가 대학교 들어갈 때까지만 살았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내가 대학생이 된 후에는 내가 시집갈 때까지만 살고 싶다고 말씀하셨다. 더 오래 사셨다면, 증손주 볼 때까지 살고 싶다 하셨을지 모르겠다.

잠깐 옥상에 올라갔다가 마당을 둘러봤다. 예전에는 분재와 수석, 예쁘게 가꾼 화초들이 많았는데 이제는 가장 눈에 띄는 게 담벼락 기둥에 생긴 이끼다. 기둥 윗면에, 작은 돌들이 놓여 있는 모습이 꼭 하나의 작은 세상 같았다. 그걸 사진으로 담고 있으려니 좀 서글펐다. 할아버지가 이제 더는 가꾸지 않는 마당 정원이.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할아버지는 노인정에 나가기 시작하셨다. 노인회 회장도 맡아 하시고 여러 번 놀러 다니기도 하셨다. 할머니가 몸이 편찮으시니 할머니가 계실 땐, 할아버지도 밖에 잘 다니지를 않으셨다. 

할아버지는 요즘이 당신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하다고 말씀하셨다. 걱정거리가 하나도 없고 몸도 괜찮다고 하시며 말이다. 어쩌면 행복 같은 건, 아주 오랜 기다림 끝에, 이제 더는 기다린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을 때 찾아오는 걸지도 모르겠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여러 이유로 자주 싸우셨다. 어렸을 땐 방학 때 길게 할머니 댁에서 지냈는데, 그때 보면 거의 날마다 그렇게 싸우셨다. 방에 내가 있다는 걸 아랑곳하지 않고 서로 언성을 높이셨다. 할머니도, 할아버지도 성격이 불같았다. 

할머니가 지금 계신다면 두 분이 싸우지도 않고, 요즘 우리 정말 행복하다며 한가로운 하루를 보내실지도 모르겠다. 아주 오랜 옛날, 할머니는 미꾸라지를 가지고 다니며 팔았다고 했다. 그러다 할아버지를 만났는데 한 번 결혼을 약속했다가 그만두기로 한 일이 있었나 보다. 어떤 곡절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할머니, 할아버지는 부부가 됐다. 

정말 미꾸라지 장수를 하셨느냐고, 할아버지랑은 왜 결혼 안 하려고 했냐는 물음에 할머니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으셨다. 그러고 보니 내 할머니, 할아버지라는 것 말고는 두 분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다. 뭘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젊었을 땐 어떻게 살았고 결혼해서는 얼마나 힘들게 사셨는지 같은 것들 말이다. 그저 그런 시간들이 내 몸과 마음 어딘가에 녹아 있을 거라고 생각해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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