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린 시절 이야기
@perspector 님의 글, 구별 본능을 보고 내 어릴 적 경험이 하나 떠올랐다. 초등학교 1, 2 학년 즈음의 어렸을 때 일이다. 나는 점심 무렵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당시의 나는 전형적인 초등학생의 모습으로 몸에 비해 커다란 등가방을 매고, 신나게 신발주머니를 흔들며 아파트 담 길을 따라 걷고 있었다. 마침 그 때 같은 길을 지나던 아저씨 둘이 있었는데, 이렇게 조그만 어린이에게 무엇을 기대했는가 모르겠으나, 그 둘은 날 붙잡고 대뜸 질문 하나를 던졌다.
“꼬마야, 너는 직업에 귀천이 있다고 생각해?”
나는 벙 쩌서 대답 한 마디 하지 못한 채 멀뚱멀뚱 두 아저씨를 번갈아 보았다. 그리고 두 아저씨는 각각 나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한 아저씨는 “직업에 귀천이 있다”며 우리가 사는 사회를 보라고 말했다. 사람들은 판사나 정치인들을 귀하게 대접하지만, 청소부나 건설노동자들은 비하하고 무시하지 않냐는 논지였다. 반대로 다른 아저씨는 “직업에 귀천이 없다”고 했다. 어떤 직업이라도 하나 없어 진다면 우리 사회는 제대로 돌아갈 수 없고 각자의 역할이 있을 뿐이라 말하며, 직업에 따라 차별받아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나는 그렇게 아저씨들에게 붙잡혀 몇 분 동안 이야기를 들어주고, 자기들끼리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지켜본 후에야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
정말 어렸을 때의 일이지만, 그 아저씨들의 토론은 꽤나 흥미가 당겼다. 서로 배반되는 양쪽의 말이 모두 옳아 보였다. 그 날 이후 이 문제는 내 머리를 떠나지 않고 틈틈이 나를 자극하곤 했다. “직업에 귀천이 있을까?”
혹시?
조금 머리가 크고, 집에서 빈둥대던 어느 날 문득 하나의 생각이 떠올랐다. 두 아저씨가 주장하는 바가 언어적으로는 동일한 모양새를 띠고 있지만, 사실은 의미가 다른 차원에서 헛돌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전자의 아저씨는 “직업에 귀천이 있다”는 현상의 존재를 역설한 것이고, 후자의 아저씨는 “직업에 귀천이 없다”는 관념의 존재를 역설했다는 것이다. 비슷한 예로,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는 헌법 제11조 제1항의 문구를 생각해보면, 분명 우리 사회는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처럼 당사자들의 사회적·경제적 지위에 따라 다른 판결을 내고 있지만, 우리는 결코 이 헌법은 틀렸다며 “국민들은 법 앞에 불평등하다”라고 고쳐 적지 않는다. 문장은, 불평등한 현실과 별개로, 사회 요소 간의 관계에 대한 관념상 정의(定義)를 기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단순히 이상과 현실의 차이를 지적하는 문제와는 미묘하게 달랐는데, 문장이 그저 “없어야 한다”는 당위의 주장에 그치지 않고, “없다”라며 적극적으로 개념을 규정하고 선언한다는 점에서 그러했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예시와 비교해 볼 수 있다.
우리 머릿속에는 곧은 세 변을 가진 삼각형에 대한 관념이 존재하지만, 실제 현상에서 삼각형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무리 각고의 노력을 들여 삼각형을 구현한다 해도 실재하는 물질은 반드시 굴곡을 포함하여 우리의 관념 속에 존재하는 삼각형을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현상으로서 삼각형이 존재하지 않다고 해서 삼각형이라는 관념상 정의를 부정할 수는 없다. 현상과 관념은 다른 차원의 문제인 까닭이다.
그러니까 도덕적 추론에서 비롯하였든 논리적 추론에서 비롯하였든, 한 사회가 공유하는 관념상의 정의도 이와 유사하게 현상과는 다른 차원으로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개구진 상상
나는 이 같은 관점에서 과거로 돌아가 두 아저씨들에게 대화를 거는 상상을 해봤다.
“전자 아저씨, 그러면 아저씨는 아저씨가 생각하는 천한 직업의 사람들을 경멸하고 업신여기시겠네요? 반대로 귀한 직업의 사람이 깔보는 투로 아저씨에게 말을 해도 당연스레 받아들이실테고요. 귀하고 천하다는게 그런거잖아요.”
“아니, 나는 그렇게 나쁜 사람도 아니고, 그렇게 비굴한 사람도 아니야.”
“왜요? 그것이 왜 나쁘거나 비굴한 것과 관계가 있어요? 귀한 사람이 천한 사람을 하대하는게 잘못인가요?”
“직업에 따라 사람을 구분해서 대하면 안되는거야. 누구도 그럴 권리는 없어.”
“응? 결국 아저씨도 직업에 귀천이 없다고 생각한다는 말 아니예요? 사실은 직업에 귀천이 없다고 관념적으로 정의 내리고 있는 것 아니냐고요.”
“... ...”
“그리고 후자 아저씨, 아저씨는 아까 보니까 청소부 아저씨 앞에 툭하고 쓰레기 던져 놓았죠? 만약 청소부가 아니라 학교 선생님이었으면 아저씨가 똑같이 했겠어요?”
“청소부는 쓰레기를 치우려고 계시는거잖니!”
“제 말은 아저씨의 태도를 말하는 거예요. 선생님 앞에서 아저씨 편한대로 누워서 수업듣고 그러진 않잖아요?”
“나는 청소부나 선생님이나 똑같이 귀한 직업이라고 생각한단다!”
“하지만 생각과 달리 결국 아저씨의 행동은 직업의 귀천을 구분하고 있네요. 그것이 무의식이 작용이었든 어디서 보고 따라한 것이었든 말이예요!”
“... ...”
실제로 그 아저씨들에게 이 같은 질문들을 던졌다면 무어라 대답했을까. 역시 상상 속에서 내지르는 펀치들만큼 통쾌한 것도 별로 없는 듯하다.
관념과 현상
“직업에 귀천이 있다”와 “없다”가 다른 차원에서 언급된다는 사실을 전제하면, 이 둘이 맞물리는 지점도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다. 관념과 현상이 완전히 별개의 것으로서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것은 아닌 까닭이다.
먼저, 관념은 곧 현상으로 현실화되기 마련이다. 예컨대, 자연 상태에서는 삼각형이라는 도형을 찾아볼 수 없지만, 삼각형이라는 관념이 있음으로써 삼각형에 가까운 물체들이 만들어 질 수 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직업에 귀천이 없다”는 당위가 없다면 우리는 현상 그대로를 당연하게 여기고 살아갈 테지만, 실제로는 그러한 관념을 기초로 제도를 올리고 법을 세워 관념을 현실화한다. 일상에서도 각자가 가지는 양심의 크기만큼 행동을 제약하는 기준이 된다. 현상은 단순히 “있다”와 “없다”로 나뉘지 않고, “있을 때도 있고, 없을 때도 있다”가 된다.
또한, 거꾸로 관념은 현상에 의해 새로이 도출되고 수정될 수 있다. 보통 유클리드 공간을 가정하는 삼각형은 직선을 변으로 갖지만, 일반상대성 이론에 따라 왜곡된 공간 안에서는 일반적인 관념과 다르게 곡선의 변을 가질 수 있다는 것과 같다. 귀천이 없다는 직업도 역시 현실에 따라서는 모든 직업에 적용되지 않을 수 있다. 가령, 생계 수단은 때론 정당한 영역 뿐 아니라 범죄의 영역에 이르기도 하고, 법으로 규정된 범죄가 아니더라도, 두 영역 사이에 존재하는 불량한 행위들이 있는데, 우리는 이 같은 직업군을 경멸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 때 ‘정당한 영역’의 범위에 대하여 새로운 논박이 오갈 수 있겠지만, 분명한 것은 직업으로조차 인정받지 못하는 생계 수단이 존재하고, 또 그 사이에 애매한 영역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이로써 “직업에 귀천이 없다”는 관념은 그것이 바탕하는 현실의 한계를 갖고 수정되며, ‘직업’은 어떠한 범위 안으로 한정될 수밖에 없다.
결국 어느 한 주장도 온전하게 옳을 수 없는 것이다.
궤변
그런데 가만보면, 앞선 논변들이 사실 언어를 가지고 장난질을 친 궤변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사회적 요소들 사이를 규정하는 관념적 정의(定義)라니. 그리고 그것과 수학적 정의와의 비교라니. 개운치 않은 맛이다. 나중에 다시 고민해 볼 것을 기약하며, 사실 치밀하게 생각해보지 않았다고 한 발 빼는 선에서 슬쩍 오늘의 일기로 남긴다.